티스토리 뷰
계절이 바뀌는 찰나의 순간
계절이 바뀌는 찰나의 순간은 언제나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숨이 턱 막히던 뜨거운 공기가 어느새 서늘한 바람으로 바뀌어 뺨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창문을 열면 들려오던 요란한 매미 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그 빈자리를 풀벌레들의 차분한 합창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한층 높아져 짙은 푸른빛을 띠고, 솜사탕처럼 흩어진 구름들은 여유롭게 흘러갑니다. 저녁 무렵이면 평소보다 일찍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하루의 끝이 조금씩 앞당겨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거리의 나무들도 잎사귀 가장자리부터 조심스럽게 색을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풍경의 변화는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줍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각자의 삶이라는 계절을 묵묵히 건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피부에 닿는 낯선 바람의 온도를 가만히 느껴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입니다.
선선해진 바람은 단지 계절의 변화만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 몇 달간 뜨거운 태양 아래서 쉼 없이 달려온 우리에게 이제는 조금 속도를 늦춰도 좋다는 다정한 속삭임과 같습니다. 자연이 화려했던 녹음을 내려놓고 차분한 색으로 옷을 갈아입듯, 우리의 마음도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켜켜이 쌓인 무거운 고민들을 하나둘 털어내야 할 때입니다. 나뭇잎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과정을 우리는 흔히 스러지는 것이라 여기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다가올 긴 겨울을 견디고 이듬해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한 가장 지혜롭고 자연스러운 비워냄의 과정일 것입니다. 이 즈음이 되면 거리의 풍경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에서도 계절의 깊이가 묻어납니다. 가벼운 옷차림 대신 포근한 겉옷을 걸친 사람들의 어깨 위로 옅은 햇살이 내려앉고, 발끝에 차이는 마른 낙엽 소리는 바쁘게 걷던 걸음을 무의식중에 늦추게 만듭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아침, 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하면서도 청량한 가을 특유의 공기는 잊고 지냈던 과거의 어느 평범하고도 아름다웠던 날들을 문득 떠오르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계절은 쓸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내면을 단단하게 채울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도 자연의 사계절을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매서운 시련의 겨울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희망찬 봄이 있고, 열정으로 가득 찬 맹렬한 여름을 지나 마침내 수확과 안식의 가을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아 조급함이 밀려올지라도, 결국은 정해진 순리에 따라 각자의 계절이 순환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꽃은 봄에 피지만 어떤 꽃은 찬 바람이 부는 늦가을에 비로소 만개하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이 결실을 맺는 시기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짧고 아름다운 계절이 흔적 없이 흩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 시간들을 충분히 감각하고 누려야 합니다. 서늘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동네 골목을 목적 없이 산책해 보거나,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반가운 이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해가 지고 난 후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쌀쌀한 기운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이내 두꺼운 이불 속에서 느끼는 포근함에 감사하게 되는 일상. 이렇게 작고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유연함처럼, 때로는 거센 삶의 풍파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흔들리며 이 아름다운 시간의 한가운데를 기꺼이 통과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